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그네시아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파일:터키 갈라티아 3.png]] 기원전 192년의 소아시아. 셀레우코스 왕조 및 그 동맹 (적색)과 로마 공화국 및 그 동맹 (청색), 그리고 중립국 (회색) BC 200년 경부터 로마와 셀레우코스 왕조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동맹을 맺었던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필리포스 5세]]가 BC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하면서 그리스 전역이 로마의 영향력 아래 들어왔지만, 그리스인들의 로마군에 대한 반감이 점차 커지면서 로마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BC 195년 주적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평화협정을 맺은 [[안티오코스 3세]]는 그리스에 직접 원정군을 파견해 패권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원정군은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했고, 로마는 동맹국인 [[로도스]]와 [[페르가몬 왕국]]의 지원을 받아 셀레우코스 해군도 격파해버렸다. 그 결과 오히려 로마군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인 [[아나톨리아]]로 쳐들어오게 되었고,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는 마그네시아 앗 시퓔룸이라는 도시 근처의 리디아 평원에서 로마군과 맞붙게 되었다. 이때 셀레우코스 제국에는 다름아닌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가 망명와있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한니발을 환영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가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서 한니발의 전공인 육군 대신 해군을 맡겨버렸고, 지상전에서는 자신이 모든 권한을 장악한 상태에서 한니발의 조언을 청하는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다.[* 한니발은 의외로 해전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는데 이후에 비티니아의 해군을 지휘해서 로마와 동맹한 페르가몬 해군도 격파했다. 다만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당시 셀레우코스 해군을 지휘할 적에는 [[에우리메돈 해전]]에서 로마와 동맹한 로도스 해군한테 졌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당시 안티오코스 3세는 한니발에게 독립된 군대를 주어 북아프리카로 보내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사람 토아스가 로마를 상대로 승리하면 한니발은 돌아오지 않고 왕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고, 결국 계획은 철회되었다. 실제로 [[위만]]처럼 망명한 타국 장군이 반기를 드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므로 이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로 군대를 이끌고 떠나면 적어도 카르타고는 그에게 복속될게 뻔한데, 그때도 한니발이 신하로 남아 있으려 했을까? 여러모로 한니발에게 독립된 지휘권을 주지 않은게 멍청한 결정이라 보긴 어렵다. 안티오코스 3세가 너무 쉽게 말아먹어서 문제지.] 한편 로마군을 지휘하는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다름아닌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이었으며, 아프리카누스 자신도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마그네시아 전투 당시에는 병 때문에 참전하지 못했으므로 왕년의 라이벌들 간의 드림매치는 무산된 셈이었다. 그리고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후반기에 한니발식 [[망치와 모루]]라는 전술은 이미 로마군에 정착한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